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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미 — 뱀을 무찌른 인간 영웅 (히타이트)

곰돌이 | 05.29 | 조회 14 | 좋아요 0

하스미(Hupasiyas, 히타이트어로 흔히 후파시야스라고도 표기)는 히타이트 신화의 일루얀카 신화군(Illuyanka Myth Cycle) 중 제2판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간 남성으로, 폭풍의 신 테슈브(Teshub)가 거대한 뱀 괴물 일루얀카에게 패배한 뒤 복수를 도모할 때 결정적인 협력자 역할을 맡은 영웅이다. 그는 신들도 혼자 처치하지 못한 일루얀카를 함정에 빠뜨리는 계략을 직접 실행에 옮겼다.

히타이트 문명 전성기인 기원전 14~13세기 무렵 점토판에 기록된 이 신화는 중부 아나톨리아 신앙의 핵심 제의 문헌인 푸룰리야(Purulli) 봄 축제와 연결되어 있다. 하스미의 이야기는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과 신의 계약·금기·운명을 다루는 복합 서사로, 히타이트 종교 문학 가운데 가장 완결된 인간 주인공 서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 정체성 — 신도 거부 못 한 조건을 내건 인간

히타이트 신화에서 하스미(후파시야스)는 신이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테슈브의 딸 이나라스(Inaras)가 일루얀카를 퇴치하기 위해 인간 세계에서 도움을 구하러 왔을 때, 그는 협력의 대가로 이나라스와 동침할 것을 당당히 요구했다. 신녀조차 그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을 만큼 대담한 인물로 그려진다.

히타이트 고대 문헌에서 하스미는 직접적인 전사가 아니라 지략을 실행하는 조력자로 기능한다. 그의 역할은 일루얀카를 술과 음식으로 흠뻑 취하게 만들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뒤, 이나라스가 테슈브를 불러 마침내 괴물을 처치할 수 있도록 현장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2. 출생·계보 — 알려지지 않은 출신, 그러나 분명한 현세적 존재

현존하는 히타이트 점토판 문헌에는 하스미의 출신지나 부모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인간'으로만 제시되며, 특정 씨족이나 영웅 혈통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는 히타이트 신화에서 그의 존재가 계보보다 행위 자체로 규정되는 인물임을 시사한다.

하스미가 신 또는 반신과의 혈연적 연결 없이 오로지 인간으로서 신화에 개입한다는 점은 히타이트 서사의 독특한 특징이다.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처럼 신성한 혈통을 부여받지 않았음에도 그는 신의 의뢰를 받고 신화적 사건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3. 일루얀카 함정 — 술과 음식으로 괴물을 묶다

이나라스는 인간 세계에 큰 연회를 준비하고 일루얀카와 그 자식들을 초대했다. 하스미는 이 자리에서 끝없이 음식과 술을 제공해 뱀 괴물들이 배를 잔뜩 채우고 지상 밖으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만들었다. 히타이트 신화 원문은 일루얀카가 너무 배불러 자신의 굴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뱀이 완전히 무력해진 순간, 하스미는 이나라스에게 신호를 보냈고 이나라스는 테슈브를 불러들였다. 폭풍의 신 테슈브는 다른 신들을 이끌고 나타나 꼼짝 못 하는 일루얀카를 마침내 죽임으로써 이전 패배의 복수를 완성했다. 이 장면은 히타이트 신화에서 인간의 계략이 신의 힘을 가능하게 만든 대표적 사례다.


4. 금기와 비극 — 창문을 열면 안 된다는 명령

하스미는 임무를 완수한 보상으로 이나라스의 탑 안에 머물게 되었다. 이나라스는 그에게 엄중한 금기를 내렸다. 바깥을 내다봐서는 안 된다, 특히 창문을 열어 인간 세계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히타이트 신화에서 이 금기는 신성한 영역과 인간 세계의 경계를 상징하는 장치로 해석된다.

그러나 하스미는 20일이 지나자 금기를 어기고 창문을 열어 자신의 처자를 바라보았다. 이로 인해 이나라스는 그에 대한 처우를 결정해야 했고, 원문에서 이후 그의 운명은 불분명하게 처리된다. 다만 그가 신성한 공간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되었음은 분명하며, 이는 히타이트 신화 특유의 인간 한계 모티프를 잘 보여 준다.


5. 후대 영향 — 푸룰리야 축제와 신화의 계승

일루얀카 신화는 히타이트의 가장 중요한 봄 축제인 푸룰리야 축제의 의례 텍스트로 낭독되었다. 이 맥락에서 하스미의 역할은 단순한 서사적 삽화가 아니라 해마다 반복적으로 상기되는 의례적 원형이었다. 축제 참여자들은 혼돈을 상징하는 뱀을 제압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주 질서의 회복을 기념했다.

히타이트 문명이 기원전 12세기 무렵 붕괴한 이후 하스미에 관한 직접적인 신화 전승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폭풍신과 뱀 괴물의 대결 구도는 아나톨리아·에게해·레반트 신화권 전반에 유사 구조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하스미는 그 구도 안에서 인간 매개자의 원형적 형상으로 신화학사에 기록된다.


★ 신의 이야기

테슈브는 일루얀카와의 첫 번째 싸움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거대한 뱀 괴물 일루얀카는 폭풍의 신의 심장과 눈을 빼앗아 자신의 굴 깊숙이 숨겨 버렸다. 신들조차 힘을 모아도 일루얀카를 정면으로 쓰러뜨릴 수 없었다. 이나라스는 아버지 테슈브의 패배를 갚고자 계략을 꾸미기로 결심하고 인간 세계로 내려왔다. 그녀가 찾아간 이는 하스미라는 이름의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나라스는 그에게 자신을 도와 일루얀카를 함정에 빠뜨려 달라고 청했다. 하스미는 조건을 내걸었다. 자신과 함께 잠자리를 같이해야 협력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히타이트 신화 원문에 따르면 이나라스는 그 조건을 수락했고, 두 사람 사이의 계약은 이로써 성립되었다.

이나라스는 인간 세계에 성대한 연회를 차렸다. 술과 음식은 끝없이 쌓였고, 일루얀카와 그의 자식들은 초대를 받아 지하 굴에서 기어나왔다. 히타이트 점토판 기록에 의하면 일루얀카 일족은 잔치 자리에서 욕심껏 먹고 마셔 배가 너무 불러진 나머지 자신들의 굴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하스미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뱀들이 완전히 무기력해진 것을 확인하고 이나라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나라스는 즉시 테슈브를 불렀고, 폭풍의 신은 하늘의 신들을 이끌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뱀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고, 테슈브는 마침내 일루얀카와 그 일족을 쓰러뜨려 이전 패배의 치욕을 씻었다. 이 장면은 히타이트 신화 전체에서 인간의 지략이 신의 힘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한 가장 선명한 예시로 손꼽힌다.

임무를 완수한 하스미는 이나라스로부터 탑 안에 머물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이나라스는 그에게 단 하나의 명령을 내렸다. 창문을 열어 바깥 인간 세계를 내다보지 말 것. 하지만 스무 날이 지나자 하스미는 끝내 금기를 어겼다. 창문 너머로 자신의 처자가 그리워진 그는 창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히타이트 신화 원문은 이후 하스미가 어떤 벌을 받았는지 명확하게 서술하지 않지만, 그가 신성한 탑에서 추방되었음을 암시한다. 신과의 약속을 지킨 영웅은 인간의 그리움 앞에 무너졌고, 신화는 그 균열을 통해 인간과 신 사이의 경계가 결코 무너질 수 없음을 조용히 선언한다. 히타이트 문명이 푸룰리야 봄 축제마다 이 이야기를 낭독한 것은, 혼돈을 이긴 질서의 회복을 기억함과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해마다 되새기기 위한 것이었다.


하스미는 히타이트 신화가 기억하는 인간의 얼굴, 즉 신의 임무를 완수하고도 필멸의 욕망 앞에 홀로 서야 했던 자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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