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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한나 — 신들의 할머니 (히타이트)

햇살이 | 05.29 | 조회 15 | 좋아요 0

한나한나(Hannahanna)는 히타이트 신화에 등장하는 위대한 어머니 여신으로, '할머니'를 뜻하는 수메르어 계통 칭호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신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 천상의 질서를 수호하며, 생명과 풍요, 신성한 지혜를 상징하는 존재로 숭배받았다. 히타이트 신화 체계 안에서 그녀는 위기에 처한 신들을 조언하고 이끄는 지혜로운 원로의 위치를 차지한다.

히타이트 신화가 기록된 점토판 문서들이 발굴된 하투샤(현 보아즈쾨이) 유적은 기원전 14~13세기 히타이트 제국의 번성을 증명한다. 한나한나는 이 문서들 속 여러 신화에 걸쳐 등장하며, 특히 풍요 신 텔레피누의 실종과 귀환 신화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그녀의 존재는 아나톨리아 지역 어머니 여신 숭배 전통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후대 아나톨리아 종교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다.


1. 정체성 — 신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

한나한나는 히타이트 신화에서 '어머니 여신'의 원형적 존재로 자리한다. 그녀의 이름 자체가 수메르어로 '할머니'를 의미하며, 이는 단순한 가족적 호칭이 아니라 신들의 세계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최고의 권위를 지닌 여성 신격임을 나타내는 칭호다. 히타이트 신화 안에서 그녀는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졌다.

한나한나는 풍요와 생명력을 관장하는 동시에 신성한 지혜의 보고로 묘사된다. 신들이 곤경에 처하거나 세계의 질서가 흔들릴 때, 그녀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조언자의 역할을 맡는다. 히타이트 신화 점토판에서 그녀는 신들의 회의에서 발언권을 가진 핵심 인물로 자주 등장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2. 출생·계보 — 신들의 세계 맨 위에 선 존재

히타이트 신화는 한나한나의 출생이나 기원에 대해 명확한 신화를 남기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그녀가 시원(始原)적 존재, 즉 다른 신들처럼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해 온 원초적 여신으로 인식되었음을 시사한다. 점토판 문헌들은 그녀의 탄생보다 역할과 행위에 집중하여 서술한다.

계보 면에서 한나한나는 폭풍 신 테슈브(Teshub)를 비롯한 주요 신들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로 연결된다. 히타이트 신화의 신들 중 상당수가 그녀로부터 생명을 부여받거나 그녀의 보호 아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러한 계보적 위치는 그녀를 천상의 위계질서 최상단에 놓는 근거가 된다.


3. 텔레피누 신화 — 꿀벌을 보낸 할머니의 지혜

히타이트 신화에서 한나한나가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하는 사건은 풍요 신 텔레피누(Telepinu)의 실종 이야기다. 텔레피누가 분노하여 세상을 떠나자 대지는 황폐해지고 곡식이 자라지 않으며 가축도 새끼를 낳지 못했다. 신들은 텔레피누를 찾으려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태양신과 폭풍신마저 그를 발견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이때 한나한나가 나서서 꿀벌을 텔레피누 탐색에 보낼 것을 제안했다. 히타이트 신화 점토판에는 폭풍신이 작은 꿀벌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한나한나가 단호하게 꿀벌이 반드시 텔레피누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은 그녀의 통찰력과 결단력을 잘 보여 준다.


4. 상징과 도상 — 꿀벌과 생명의 이미지

한나한나와 꿀벌의 연결은 히타이트 신화에서 매우 인상적인 상징적 결합이다. 꿀벌은 작지만 먼 거리를 날아다니며 꽃을 찾아내는 능력, 그리고 꿀이라는 생명을 주는 달콤한 물질을 생산하는 특성 때문에 어머니 신격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한나한나가 꿀벌을 선택한 것은 겸손해 보이는 존재 속에 깃든 힘을 이해하는 지혜를 상징한다.

히타이트 신화에서 꿀벌이 텔레피누를 찾아낸 뒤 그를 꿀과 밀랍으로 정화하는 의식적 행위도 중요하다. 이는 한나한나가 단순히 탐색자를 파견하는 역할을 넘어, 치유와 정화의 힘까지 주관하는 여신임을 드러낸다. 아나톨리아 전역에서 어머니 여신과 꿀벌의 연결은 후대까지 지속되는 강력한 종교적 모티프가 되었다.


5. 후대 영향 — 아나톨리아 어머니 여신 전통의 원류

한나한나는 히타이트 제국이 기원전 12세기 무렵 붕괴된 이후에도 아나톨리아의 어머니 여신 숭배 전통 속에 그 흔적을 남겼다. 프리기아의 키벨레(Kybele), 리디아와 소아시아 전역에 퍼진 대지 어머니 여신 개념은 히타이트 신화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토착 종교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한다.

히타이트 신화 연구는 20세기 초 하투샤 발굴 이후 본격화되었으며, 한나한나 관련 점토판 문서의 해독을 통해 고대 근동 어머니 여신 신화의 다양성과 풍부함이 재조명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이집트 신화와 구별되는 아나톨리아 고유의 신화적 상상력을 보여 주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 신의 이야기

히타이트 신화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는 풍요의 신 텔레피누가 홀연히 사라진 사건이다. 어느 날 텔레피누는 까닭 모를 깊은 분노에 사로잡혀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땅을 모두 버리고 떠나 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대지에는 즉시 재앙이 찾아왔다. 안개가 창문을 가리고 연기가 집 안에 가득 찼으며, 화덕의 불은 꺼지고 신들의 제단도 식어 갔다. 양은 새끼를 외면하고 암소는 송아지를 돌보지 않았으며, 보리와 밀은 자라기를 멈추었다. 목초지가 마르고 샘이 고이며 초목이 시들어, 인간과 신 모두 굶주림의 공포에 떨게 되었다. 신들의 왕 폭풍신 테슈브가 먼저 나서서 텔레피누를 찾아 나섰으나, 광활한 땅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태양신 역시 같은 운명이었다. 신들의 회의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바로 그때 신들의 할머니 한나한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조용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꿀벌을 텔레피누 탐색에 보내자고 제안했다. 히타이트 신화 점토판에 기록된 이 장면에서, 폭풍신 테슈브는 한나한나의 제안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토록 위대한 신도 찾지 못한 텔레피누를 어찌 작은 꿀벌 하나가 찾아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나한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꿀벌이 온 산과 계곡을 샅샅이 훑고 물과 진흙 속 어느 구석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고 단언했다. 마침내 신들의 회의는 한나한나의 뜻을 따르기로 결의하였고, 그녀는 꿀벌에게 텔레피누를 찾아 나설 것을 명했다. 꿀벌이 날아가며 모든 산과 강, 숲과 초원을 뒤지기 시작했다.

꿀벌은 마침내 깊은 잠에 빠진 텔레피누를 발견했다. 히타이트 신화의 전승에 따르면, 꿀벌은 그를 쏘아 잠에서 깨운 뒤 날개로 정화하고, 자신이 만들어 낸 순수한 꿀과 밀랍으로 그를 씻어 냄으로써 텔레피누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의식을 행했다. 잠에서 깨어난 텔레피누는 처음에 더욱 격렬한 분노를 터뜨렸으나, 이후 신들과 마법사 여신 카므루세파(Kamrushepa)의 의례적 정화 의식을 통해 마침내 분노가 풀렸다. 텔레피누가 신들의 세계와 대지로 돌아오자 안개가 걷히고 땅이 다시 풍요로워졌으며, 양은 새끼를 품고 암소는 송아지를 낳았다. 곡식이 자라고 샘이 흘렀다. 한나한나가 꿀벌에게 불어넣은 신뢰, 그 작은 피조물에 대한 믿음이 신들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이었다. 히타이트 신화는 이 이야기를 통해 지혜가 힘보다 강하며, 가장 작은 존재 속에도 세계를 구할 가능성이 깃든다는 진리를 전한다.


히타이트 신화의 할머니 한나한나는 꿀벌 하나의 날갯짓으로 세계를 구한 지혜의 상징으로, 수천 년을 넘어 오늘도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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